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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武俠小說)/변황전설(邊荒傳說) - 黃易

卷四 第九章 시불아여(時不我與)

by 少秋 2024. 11. 27.

 

第九章 時不我與

 

 

고언이 눈을 뜨고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연비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야 네놈을 보니 네가 뼈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는 걸 믿을 수 있겠구나. 하하! 네가 내공을 잃은 게 아니구나.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느냐. 적어도 나처럼 아직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야지."

 

연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내 내공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 개새끼들이 아직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상황은 확실히 매우 이상하구나. 언젠가는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언은 자신의 고통을 잊고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치료될 가능성이 있네! 우리 다시 변황집에서 신나게 놀 수 있겠어. 솔직히 말해서, 연비 너의 검(劍)이 없으면 나와 방의(龐義)는 변황집에서 매일 밤 편히 잠들지 못할 거야."

 

연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져! 네 상처는 어때?"

 

고언은 두 눈을 빛내며 깊은 원한을 담아 말했다:

"나를 죽이지 않는 한 별거 아니니 며칠 더 누워 있으면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누가 한 짓인지 알아?"

 

연비는 차마 그를 속일 수 없어 말했다:

"이 일은 이미 송비풍이 처리했어. 여기는 건강이지 변황집이 아니니 우리가 잘난 체 할 곳이 아니다."

 

고언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사씨 집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더더욱 불가능하지. 송비풍은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 매일 내 상세를 살피러 와서 진기로 내 상처를 치료해 주었지, 지금 내상은 거의 다 낳았지만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는 여전히 좀 아파."

 

또 참지 못하고 말했다:

"누가 감히 사안을 건드렸지?"

 

연비가 말했다:

"넌 모르는 게 제일 좋아, 나서서 손을 쓰는 건 내 책임이니까."

그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말했다:

"아직도 기천천을 보고 싶어?"

 

고언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보고 싶지, 정말 보고 싶어."

 

연비가 기꺼이 말했다:

"내가 이미 송 노형께 부탁을 드렸어, 그가 우리를 대신해 안공께 사정을 말씀해 주실 거야, 이제 그 어르신네의 의사에 달려 있지."

 

송비풍이 이때 들어와 먼저 고언의 이마를 만져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이 내렸어! 고 형제의 기초가 아주 좋군!"

연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어르신께서 자넬 보자고 하시네."

 

연비는 고언과 눈짓을 주고받은 후 송비풍을 따라 방을 나섰다.

 

지난번 그가 사안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사씨 집안의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듯한 위세와 기품을 느꼈고, 저택 안은 활기가 넘쳤으며 위아래가 편안하고 태평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무거웠고, 저택의 크고 웅장한 집과 누각들도 이전에 그에게 주던 단단하고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잃었다. 사씨 집안은 이미 극도로 번성했다가 쇠락하는 처지에 이르렀음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사안이 세상을 떠난다면 오의항(烏衣巷)에서 가장 찬란한 사씨 저택은 남은 것은 혼백이 없는 껍데기뿐일 것이다.

 

연비는 무심코 물었다:

"소기(小琦)는 왜 안 보이지요?"

 

송비풍이 말했다:

"소기는 며칠 전부터 잠도 못자고 자네를 밤낮으로 간호했다네. 자네 상태가 갑자기 변할 때 나에게 알리지 못할까 걱정이 돼서 말일세. 어젯밤에는 정말 버틸 수 없는 것 같아서 그녀를 쉬게 했네, 지금쯤 자고 있을 거야. 그녀는 마음씨가 착한 아이지."

 

연비는 마음속으로 깊이 감동했다. 그는 물론 소기에게 감사했지만, 송비풍의 보살핌에 더욱 감동을 받았다. 그는 이미 이용 가치가 없는 폐인이 되었는데도 어떻든 간에 송비풍은 여전히 밤새 침상을 지켰다. 사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백안시를 당하더라도 사안, 송비풍, 소기 이 세 사람 덕분에 사씨 집안에 깊은 정을 갖게 되었다.

 

송비풍은 그를 데리고 중원(中院)의 사계원(四季園)으로 들어갔고, 망관헌이 그 중심에 우뚝 서 있었는데, 중원의 다른 누각들과 견주어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았다.

 

자태가 우아한 중년 미부 한 분이 두 눈썹을 깊이 찌푸린 채 망관헌 대문 앞의 긴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방금 사안을 만나고 물러나는 듯했다. 비록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연비는 왠지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송비풍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의를 표하며 연비와 함께 한쪽으로 비켜서 예를 표했다.

 

미부는 억지로 한줄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송숙(宋叔) 안녕하세요! 이분 공자님은……"

 

송비풍이 말했다:

"연비 연공자입니다."

또 연비에게 소개하며 말했다:

"왕부인은 현소야의 누님이십니다."

 

연비가 그녀를 보니 전혀 거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태도도 겸손하고 친절하여 호감을 느끼고 황급히 예를 올렸다.

 

사도온(謝道韞)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보니 연공자셨군요, 우리 집안일로 공자께서 화를 입으셨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다행히 공자께서는 길인천상(吉人天相)이라 건강을 회복하셨으니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평소에 달콤한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는데, 하필 지금은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사도온은 송비풍에게 말했다:

"송숙께 연공자를 잘 부탁드려요."

하고는 예를 갖춘 후 떠났다.

 

송비풍이 말했다:

"노제! 가세!"

 

연비가 사도온의 뒷모습에 던졌던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왕가는 왕국보의 집안인가요?"

 

송비풍은 씁쓸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문(高門)은 고문끼리지. 사안 어르신도 이 습관을 바꿀 수는 없지. 도온 대소저는 왕국보 당숙 왕희지(王羲之)의 둘째 아들 왕응지(王凝之)에게 시집갔지. 아!"

 

연비는 놀라며 물었다:

"그녀의 결혼생활이 즐겁지 않은가 보죠? 아! 제가 이런 일을 물어서는 안 되는데."

 

송비풍이 말했다:

"괜찮네, 사안 어르신 외에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우리 사씨 집안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풍류를 즐기는데 반해 왕가 쪽은 전혀 다른 부류지. 왕국보와 그의 동생 왕서(王緒)는 이익에 눈이 먼 자들이고, 왕응지는 천사도(天師道)에 빠져 있으니 대소저가 과연 즐거울 수 있겠는가?"

 

연비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명문대가의 삶은 결코 겉모습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오의항의 명문가 중에서도 으뜸인 사씨 집안은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직면해 있었고 교자관(餃子館)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갑자기 그는 사도온을 보고 왜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종종 혼자 장막 안에 틀어박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하셨는데, 그 표정이 바로 사도온의 표정과 같았다.

 

사안은 혼자 망관헌 한쪽 구석에 앉아 향을 피우고 있었는데, 고아하고 고풍스럽게 꾸며진 재헌(齋軒)에 서향(書香)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사안은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열중해서 보고 있었다.

 

송비풍이 말했다:

"안 어르신, 연공자가 왔습니다!"

말을 마치고 조용히 망관헌 밖으로 물러났다.

 

사안은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서진(書鎮)으로 눌러 고정시킨 뒤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비, 자네는 늘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이리 와서 앉게나, 자세히 좀 보세."

 

연비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안의 신분과 지위로 자신을 돌보는 일을 송비풍에게 맡겼다는 것은 이미 관심과 배려가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안은 그가 매번 깨어날 때마다 모든 번잡한 일을 제쳐두고 즉시 그를 찾았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단순히 사현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연비는 그의 옆에서 예를 올리고 사안의 눈길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안은 여전히 그렇게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로웠지만 연비는 그의 귀밑과 이마 언저리에서 지난번에는 없었던 흰 머리카락 십여 가닥을 발견했다.

 

사안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매번 소비(小飛)를 볼 때마다 마음이 즐거워진다네. 소비 같은 인물은 세상에 보기 드물기 때문이지, 내가 일부러 자네를 추켜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작은 길에도 볼 만한 것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관상을 보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전문 기술이지. 성인(聖人)들도 이 기술에 능했다는 말이 있네. 하하! 나 사안은 평소에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네. 기술 자체에는 크고 작음의 구별이 없고, 크게 쓰면 세상을 움직이는 기틀이 되고 작게 쓰면 오히려 처세에 도움이 되지. 더 넓게 확장하면 치란흥쇠(治亂興衰), 천도기후天(道氣候), 인정사회(人情社會)까지 알 수 있으니 그 기술은 간결하면서도 심오하여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지."

 

청담(清談)의 고수라 할 수 있는 사안을 마주한 연비는 당황스러워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안공께서는 저를 그렇게 추켜세우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 어릴 때부터 별다른 큰 뜻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사안은 천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가 있는 듯 탄식하며 말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히 평범하지 않은 일을 만나게 되지. 소비, 내공을 잃은 후 몽둥이로 맞아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를 내게 말해 줄 수 있겠나? 천명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니, 자네가 큰 뜻을 품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나 사안만 해도 평생 큰 뜻을 품은 적이 없지만 지금 어떤 자리에 앉아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연비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제가 어찌 안공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사안은 눈빛을 그의 얼굴로 돌려 정광을 번쩍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언젠가는 자네도 나 사안의 안목과 말을 이해하게 될 걸세."

그리고는 한 손으로 서진을 들어 종이를 집어 들고 연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현 조카의 누나인 내 조카딸 도온이가 어젯밤에 지은 시(詩)인에 내게 품평해달라고 부탁한 것인데 자네도 한번 읽어 보게."

 

연비는 사도온에게 자신도 알 수 없는 호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두 손으로 건네받았다.

 

종이에 쓰인 시의 제목은 '의혜중산영송시(擬嵇中散詠松詩)'로 글씨체가 수려하고 맑았다.

 

사안이 말했다:

"혜강(嵇康)은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적이 있어 혜중산(嵇中散)이라고도 불리지. 도운이 지은 것은 혜강의 '유선시(遊仙詩)'를 모방한 것인데 원래 작품은 약을 먹고 신선이 되어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용이다."

 

연비는 마음이 움직여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보았다. 시문은 모두 팔구(八句)로 쓰여 있었다.

 

멀리 산 위의 소나무를 바라보니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구나.

(遙望山上松,隆冬不能凋.)

 

원래는 내려가 쉬려 했는데 저 높은 가지를 바라보고 있네.

(原想游下息,瞻彼萬仞條.)

 

뛰어올라도 오를 수 없으니 머리 조아려 왕교를 기다리네.

(騰躍未能升,頓首俟王喬.)

 

때가 왔으나 나를 도와주지 않으니 대운에 따라 그저 떠돌아다닐 뿐!

(時哉不我與,大運所飄飄!)

 

연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왕교가 누구입니까?"

 

사안이 대답했다:

"왕교는 신선 왕자교(王子喬)를 가리키지. 도온의 이 시는 원래 시와 다른 점이 있다. 원래 시처럼 왕자교가 신선이 된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저 그의 백일비승술(白日飛升術)을 빌려 저 멀리 우뚝 솟은 수산(祟山)의 꼭대기에 있는 푸른 소나무를 가까이 하고 싶다는 것이지. 하지만 범인인 우리가 당연히 왕자교와 같은 방법을 쓸 수 없으니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비는 시전지를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왕부인께서는 안공이 은퇴하시길 바라는군요!"

 

사안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내 본심은 이미 결정되었고 도온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지. 이 시는 그저 그녀가 내 결정에 동의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뿐이야. 하지만 건강에는 내가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하나 있는데 그 일이 끝나는 날이 바로 내가 관직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날이 될 걸세."

 

연비는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자신이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사안이 당연히 말해 주었을 것이다.

 

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소비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지둔대사(支遁大師)가 두 번이나 자네를 보러 왔었지. 자네의 갑자기 춥고 갑자기 뜨거워지는 증상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군. 지둔은 불도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단도(丹道)에도 조예가 깊은 불문 고승으로 건강에는 이런 사람이 그뿐이니 그가 알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알 수 없을 걸세."

 

연비는 마음이 편치 않아져서 말했다:

"저 혼자 나가서 좀 걷고 싶으니 안공께서는 사람을 딸려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사안은 그를 한참 동안 유심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둔이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던데, 직접 자네에게 몇 가지 일을 알아보려는 것 같더군. 그런데 나는 줄곧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나?"

 

연비는 깜짝 놀랐다.

 

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지. 개인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말일세. 황인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우리는 탁발규와 자네가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지. 자네가 변황집에서 사람들과 싸우는 것 외에는 술만 마신다고 하던데, 생각해 보건데 분명 가슴 아픈 과거가 있는 것 같더군! 심지어 지금 자네의 기이한 상세의 원인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네가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자네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또 지둔대사가 헛수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네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한 나는 자네와 그를 만나게 할 생각이 없네."

 

연비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사실 숨길 것은 없습니다. 다만 말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고, 또 일이 매우 복잡하고 기이한데다가 저는 또 영락없는 게으름뱅이라 안공께 괜히 신경만 쓰시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휴!"

 

사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대단한 게으름뱅이지만 아쉽게도 어쩔 수가 없구만. 지금 자네는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고 또 임요(任遙) 같은 무서운 적도 있으니 혼자 외출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나? 자네는 아직도 천천(千千)을 만나고 싶은가?"

 

연비는 더욱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습관은 고치기 어려운 법이죠. 여러 해 동안 저는 아무 구속 없이 혼자 자유롭게 다녀서, 혼자서 문제를 감당하고 해결하는 데 익숙합니다. 안공께서는 더 이상 제 일로 심력을 낭비하지 말아 주십시오. 천천 소저에 대해서는, 휴!"

 

사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천천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고언이지 자네가 아니지 않나?"

 

연비는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송 대형이 말씀드린 겁니까?"

 

사안은 아연실소하며 말했다:

"어찌 비풍이 말할 필요가 있겠나. 변황집에서 자네가 청루에 발을 들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런데 이번에는 기천천을 만나겠다고 할 뿐만 아니라 고언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더군. 고언은 종일 청루와 화방(畫舫)을 떠돌지. 나 사안은 경험 많은 사람인데 어찌 그 속을 모르겠나?"

 

연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언 이 녀석이 저를 협박하면서 천천 소저를 만나야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변황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상처를 입은 그를 보고는 하는 수 없이 염치 불구하고 안공께 이런 무례한 청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좋습니다! 안공께서 이미 상황을 다 알고 계시니 저는……"

 

사안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

"자네는 이 일에서 빠지고 싶은 겐가? 그건 내가 허락할 수 없지. 고언이 천천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겠네만 자네가 손님으로 함께 가야 하네. 그곳에 가는 것은 자네 마음이지만 비풍이 반드시 자네와 동행해야 하네. 자네도 고언이 천천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겠지!"

 

연비는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안이 말했다:

"소현이 이미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와 유유는 닷새 안에 건강으로 돌아올 것이라더군. 돌아오면 자네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네."

이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무슨 일을 하러 가든, 또 누구를 만나든 비풍이 자네를 위해 비밀을 지켜 줄 걸세.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밖에서 자네를 위해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도 있고."

 

연비가 말했다:

"안공께서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때 송비풍이 들어와 말했다:

"왕공(王恭)대인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사안은 연비에게 말했다:

"천천 일은 내가 알아서 조치하겠네. 고언이 회복된 뒤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다시 송비풍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소비가 일이 있어 외출을 하니 비풍 자네가 연비와 함께 좀 다녀오게나."

 

연비는 사안이 바쁘다는 것을 알고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

 

탁발규와 모용린은 나란히 말을 타고 산언덕에 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에는 백설이 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미세한 눈가루가 흩날렸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이번 눈은 아마도 봄에 내리는 마지막 눈일 것이다.

 

같은 산언덕이지만 어젯밤과 오늘 느끼는 감정은 전혀 딴판이었다. 승리의 열매는 이미 탁발규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탁발부에서 그를 반대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이미 완전히 궤멸되었고, 남은 아들들은 거론할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나라를 세우는 길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했고, 강한 이웃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 그는 묵묵히 밭을 갈며 적당한 때를 기다려야 했다.

 

어젯밤 그는 수하 장수들과 병사들을 세 갈래로 나누어 계곡 입구 남쪽에 있는 굴돌의 진지를 기습했다. 계곡 안에 있던 굴돌이 계책을 세워 급히 반격하며 계곡 북쪽의 병력을 동원해 전투에 참여하려 하자 모용린은 약속대로 북쪽에서 굴돌을 협공했다. 굴돌의 군대는 대혼란에 빠져 궤멸되었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탁발규는 병사들을 이끌고 계곡에 들어가 강하게 공격했지만 굴돌에게 북쪽에서 포위를 뚫고 도망칠 기회를 주고 말았다. 하지만 탁발규는 굴돌의 군대가 이미 사람과 말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멀리 도망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 양측의 인마가 계곡 북쪽 산언덕에서 만나 전면적인 추격전이 눈앞의 눈이 가득한 황야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그들은 굴돌을 생포했다는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탁발규는 이미 부하들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려 만약 자기편 군사가 굴돌을 잡으면 먼저 참수한 뒤 보고하도록 했다. 이 화근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그의 시체만 가져올 수 있도록 말이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 탁발규는 누구보다도 이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모용린은 오만한 표정으로 마치 승리의 공로가 모두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채찍을 들어 전방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라, 굴돌을 잡았어!"

 

두 사람을 둘러싼 연합군은 그 말을 듣고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탁발규는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모용족의 전사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말에 매달린 굴돌을 끌고 의기양양하게 그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탁발규의 심장은 그대로 내려앉았다.

 

지금 그는 모용수에게 의지해야 했다. 굴돌을 죽이려면 모용린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된다.

 

굴돌을 압송하던 전사들이 언덕 꼭대기까지 말을 몰았다.

 

"퍽!"

 

얼굴이 사그라진 재처럼 창백해진 굴돌은 말 등에 묶여 있던 소 힘줄로 만든 끈에서 풀려나 사람들에 의해 말 등에서 떠밀려 내려와 탁발규와 모용린의 말 앞 눈밭에 내동댕이쳐졌다.

 

평소에는 자신이 크고 용맹하다고 자랑하던 굴돌은 온몸이 피범벅이었고 수염은 피에 물들어 있었으며 온 몸에 눈가루를 뒤집어쓴 채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양손은 여전히 등 뒤로 묶여 있어 바닥에 쓰러진 채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었다.

 

두 명의 전사가 그를 팔에 끼워 땅에서 일으켜 반 무릎을 꿇게 했고, 그중 한 명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채어 그가 말 위에 높이 앉아 있는 탁발규와 모용린을 우러러보게 했다.

 

모용린이 장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굴돌아! 너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구나!"

 

탁발규는 이 한 마디로 모용수가 몰래 굴돌과 연락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양측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탁발규 자신이 굴돌과 처지가 바뀌었을 것이다.

 

굴돌은 탁발규를 노려보며 깊은 원한이 서린 눈빛을 쏘아 보내며 큰 소리로 욕을 했다:

"탁발규, 너는 득의양양하지 마라.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결말을 맞이할 테니."

 

탁발규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너는 살아서 보지 못할 것이다!"

손을 뒤로 뻗어 극(戟)의 자루를 잡았다.

 

모용린이 소리쳐 멈추게 하며 말했다:

"잠깐! 부왕(父王)께서 명령을 내리시길, 이 자를 생포하면 데리고 돌아오라고 하셨네."

 

탁발규는 겉으로는 조금도 이상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하늘을 뒤엎을 듯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언젠가 나 탁발규는 너희 모용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탁발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왕(燕王)의 분부이시니 탁발규인 제가 당연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